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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는꿈도잘안꾸는걸

나는꿈도잘안꾸는걸 현지 짙게 깔린 어둠을 배경으로 한 여자가 새하얀 옷을 입고 침대 위에 가로로 걸쳐 누워있다. 상반신은 완전히 뒤로 젖혀져 있고 팔과 머리는 침대 밑으로 늘어져 있다. 마치 깊게 잠든 듯하지만, 중앙의 커튼 사이로 여자를 바라보는 말과 탐욕스러운  표정의 괴물을 보아하니 좋은 꿈을 꾸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원숭이 모습을 한 괴물은 그녀를 먹잇감처럼 바라보며 배 위에 앉아 여자를 누르고 있다. 이 괴물은 악마로, 서구 전설 속에 주로 등장하며 특히 혼자 잠자는 여성의 꿈속에 나타나 겁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침실의 커튼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말의 하얀 눈은 섬뜩하다. 벌름거리는 콧구멍, 살짝 벌어져 있는 입, 바짝 서 있는 귀는 말이 어떤 상태인지를 보여준다. 말 또한 성적 에너지를 상징하여, 여자가 꿈속에서 유린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존 헨리 푸셀리(1741~1825)는 성적 충동이 불러일으킨 흥분과 쾌락, 공포와 두려움을 담아 그림을 그렸다. 무의식의 영역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악몽〉 을 보고 있으면, 오싹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어 그림을 오랫동안 살펴보는 것이 어려웠다. 특히 말에 눈길이 닿으면 얼마 못 가 화면을 꺼야 했다. 나는 악몽을 거의 꾸지 않는다. 꿈을 꾸지 않는 편이며, 꿈을 꾸더라도 금방 잊어버린다. 그래서 꿈보다, 악몽 같은 현실에 압도되는 순간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를테면 버스를 놓쳐서 약속한 시각에 늦을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사실 늦었다) 한참 기다린 버스가 정류장에 도달했을 때, 집에 두고 온 챙겨야 했던 무언가가 생각난다. 시간 약속은 어기고, 물건은 빠뜨리고. 정말 중요한 물건이 아니라면 버스에 탑승하지만, 악몽이라면 깨어나고 싶은 순간이다. 이와 함께 코로나 시대의 대학생에게 사소한 현실에서의 악몽은 과제가 쏟아질 때이다. 과제를 받았을 때는 분명 넉넉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밀려든 과제를 보며 이게 악몽이라면 제발 없어지길 하고 생각하곤 한다....

3. 예술 혐오

예술 혐오  아현 마이클 히스는 2002년 11월 3일자 《더메일온선데이 the Mail on Sunday》에 한 만평을 실었다. 한 남자가 미술 작품을 보며 깜짝 놀라는 장면이 담긴 그림으로, 작품 옆에는 터너 상을 받은 작품이 테이트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음을 명시하는 팻말이 있다. 지루함을 느끼는 남자가 감상하는 작품에는 이런 글이 잔뜩 적혀있다. “여기서 하는 말은 전부 헛소리예요! 예술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속임수와 다를 게 없다고요. (…) 여하튼 당신, 그걸 보러 온 거군요. 그래서 그 바보가 누구던가요? 기왕 여기 온 김에 시원한 우리 레스토랑에 들어와서 산뜻한 화이트 와인 한 병 곁들이며 점심이나 먹는 건 어떨까요?”¹ ‘더 메일 온 선데이’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영국의 신문사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요일에 신문을 간행하며 영국인이 가장 많이 읽는 신문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신문사에서 ‘예술’을 꼬집는 만평이 실렸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예술을 ‘예술’로 떠받드는 이들을 겨냥하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예술은 대중과 멀어진 것 같다. 미술사를 공부하면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선사시대의 동굴벽화는 주거공간과 밀접한 곳에서 시작되었지만(호모사피엔스의 생활 양식상 어쩔 수 없는 결과였을 테지만 넘어가도록 한다), 현재 예술은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유명한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가서 전시를 감상해보자. 여기서 또 다른 조건으로 당신은 예술을 따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라 가정해보자. 그런 당신이 입장한 전시장의 장면은 참 낯설다. 작품 하나하나에 달린 캡션을 봐도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고, 도슨트 해설이나 리플렛, 월 텍스트를 읽으면 전문 용어와 미술사에 대한 전문 지식이 요구된다. 분명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나 복잡한 현대 사회에 관해서 말하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이는 비단 비전공자의 상황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도 ...

2. 상실과 환대의 시나리오

상실과 환대의 시나리오 강리 사이프러스의 잎사귀를 스치는 밤공기는 잿빛이 감도는 코발트색이다. 짙은 파란색이 자아내는 스산함을 재빠르게 가로지르는 백색 구름이, 하얗게 빛나는 보름달을 감싸 안는다. 달빛은 어둠 속에서 형체를 길어올린다. 그러자 고대 로마의 벽돌 피라미드가 드러난다. 하늘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가는 피라미드의 날카로운 모서리는 명과 암을 분명히 구분한다. 피라미드의 밝은 면을 따라 시선을 낮추면, 나란히 서있는 세 개의 조형물이 보인다. 왼편에는 경사진 지붕을 이고 있는 함(函)이 있고, 오른편에는 좌대 위에 올라간 좁은 주둥이에 부푼 배를 가진 검은 트로피가 있다. 가운데에는 유려한 곡선으로 꾸며진 연분홍빛 공예품이 있는데, 피라미드 뒤편에 서있는 무뚝뚝한 도리아식 기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세 조형물 앞에는 두 개의 지석이 놓여있다. 달빛이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화면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시선은, 그 둘 중 리스(wreath)가 놓인 지석으로 향한다. 지석이 있는 풀밭 위로 달빛이 연극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쏟아진다. 달빛을 받아 마치 한낮처럼 빛을 발하는 대지는 불안하고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대기와 부딪히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처음 이 극적인 장면에 접했을 때,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단 둘이었다. 작가와 제목, 그러니까  표도르 브루니가 그린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총독, M. K. 드 머더의 무덤〉 이라는 사실이 전부였다. 이런저런 정보를 뒤적였지만, M. K. 드 머더에 관하여 알려진 바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아카돌리코 묘지¹에서 2016년에 열린 전시《피라미드의 발치에서: 로마 외국인 묘지의 300년》의 카탈로그에서 머더로 추정되는 인물에 관한 정보를 딱 한 문장 얻을 수 있었다. “1834년에 그의 시신은 모스코바로 송환되었다. (1834; his body was repatriated to Moscow.)”² 브루니가 작품을 완성한 시점은 1835년이다. 그러니까 브루니가 그림을 그렸을 무렵에는 이미 그...

1. 검색해보니 일기도 에세이라고 하더라

검색해보니 일기도 에세이라고 하더라 수연 2021년 4월 2일 금요일 아니, 그렇게 자꾸 쳐다보시면… 흥미로운 글쓰기를 시작했다. A가 단어를 제시하면 B가 작품을 찾는다. C는 그에 관한 글을 에세이로 쓴다. D는 C가 쓴 글을 보고 A가 처음 제시한 단어를 맞히게 될 것이다. 이번에 나는 C의 역할을 맡았다. 전적으로 앞 사람의 결정에 따른 글쓰기다. 작품이 내 마음에 와닿지 않아도 일단 써야 한다. 솔직히 글과 작품만을 보고 이루어진 온갖 추측의 결과가 한 단어에 귀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만, 재밌으면 됐지, 뭐. 답을 맞히는 입장은 아니지만 한 번 추측해보자면, ‘응시, 표정, 얼굴, 시선…’ 정도. 그건 그렇고, 그렇게 자꾸 쳐다보시면 부담스러워요. 등장인물의 ‘빤한’ 시선이 부담스럽다. 글을 쓰려면, 작품을 오래도록 보아야 하는데······. 작품은 보는 사람마다 각자의 사연에 따라 감상하기 마련인데, 내 사정을 대입해 표현하자면 一 작품에 묘사된 등장인물의 눈이 글을 쓰라고 재촉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은 기분이 나지 않으므로 패스. 오늘의 반성 : 글을  못 썼다.   아니 안 썼ㄷ… 내일의 계획 : 얼리버드가 되겠다. (대충 일찍 일어나겠다는 소리) 2021년 4월 4일 일요일 결국 저 눈이 문제야 3시간째. 그냥 보고만 있다. 여전히 올곧은 눈빛이다. 작품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저 시선을 어디선가 보았다. 그 장면을 회고한다. 분명히 작품에 시선을 두고 분석하는 주체는 나다. 그런데  정이지의 〈Season of Fig 3〉 는 나를 분석하려 든다. 응시의 대상이 된 나는 끊임없이 분열된다. 살짝 옆으로 튼 얼굴로 감상자를 곧게 바라보는 시선에 미간이 뚫린다. 一 아릿하다. 시선은 미간의 표피를 통과해 회백색 대뇌겉질(두께 2~4mm 정도의 얇은 살점에 불과하지만 기억, 언어 등 인간 활동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는 부위)에 도달한다. 자극을 받은 뇌에서 기억이 피어오른다. 기억은 잠시 뒤로 하고 임무로...

3. 의자가 쏘아올린 작은 별

  의자가 쏘아올린 작은 별 현지 가보고 싶었던 음식점 근처에 우연히 ‘아마도 예술공간’이 있었다. 때마침  전시 《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 이 열리고 있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장에 방문했다. 여기도 작품이 있을지 의문을 자아내는 지하 공간으로 내려가니, 전시실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지하의 눅눅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무서운 느낌을 주었으나, 동시에 비현실적인 분위기도 느껴졌다. 약간의 공포를 누르고 전시실 밖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따라가니, 조명이 붙어있는 의자와 감자칩 한 바구니를 마주하게 되었다. 의자의 손잡이와 뼈대에는 나무토막이 덧대어져 있었으며, 그 위로 작은 스탠드 같은 조명이 세워져 자리를 비추고 있었다. 조명 아래로는 작은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손만 뻗으면 닿을 위치에 감차칩 한 바구니가 있었다. 의자의 맞은편 바닥에는 은색 별이 붙어있었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앉아서 관람하는 작품입니다'라는 문구는 ‘앉으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호기심으로 나를 가득 채웠다. 공간을 채운 조명은 불이 꺼진 방을 홀로 밝히는 스탠드를 떠올리게 했다. 빛을 받은 의자는 몇 가지 장치가 달려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골드버그 장치(생김새나 작동원리는 아주 복잡하고 거창하지만 아주 간단한 일을 하는 기계)를 떠올리게 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흔히 보던 녹색 우유 상자가 의자 발 받침대로 설치되어 있었다. 우유 상자를 비집고 나온 실타래들은 마치 딱딱한 플라스틱이 포근한 발 받침대가 된 듯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커다란 은색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깜깜해졌다. 어두움을 무서워하는 나는 “악!”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나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지이이잉—’.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나며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있던 별이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

2. 우리는 화초이고 개구리이다

  우리는 화초이고 개구리이다 수연 2020년 여름, 엄마는 직장 동료한테 받았다며 ‘크루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열대 식물을 가져왔다. 엄마는 바쁜 직장 생활에도 크루시아에게 물 주기를 잊지 않았지만, 날씨가 추워지면서 크루시아는 모두가 집을 비웠을 때의 한기를 견디지 못했다. 여름 방학 때 크루시아를 처음 보고 겨울 방학을 맞이해 다시 얼마간 본가에 다녀온 나는 파릇하던 식물이 반년 만에 시들어가던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좁은 화분에 겨우 뿌리를 내리고 힘겹게 자리 잡은 식물은 인간의 미적 관상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손수 길러진다. 식물은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지만, 이는 화분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인간의 관리와 제약 아래 이루어진다. 화분 속 식물에서 현대 사회의 그늘 아래 발버둥 치는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개인으로서 인간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사회 체제의 존속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하며, 사회나 특정 집단의 규범에 따라 규격화되기도 한다.  화분에 심겨 길러지는 식물과 사회의 흐름 속에 힘없이 내던져진 인간.  현대인과 식물의 닮은꼴을 인지한 계기는  장성은의  〈 flowerpot〉 연작 이었다. 연작은 2009년에 제작된 4장의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작품의 크기는 45X33.6cm로 동일하며, 모두 보존성을 높인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Archival Pigment Print)로 인쇄되었다. 동일한 크기와 인쇄 기법으로 제작된 4장의 사진에는 엇비슷한 광경이 포착되어 있다. 먼저 녹색 스타킹을 신은 사람이 다리를 꼬고 꽃문양과 꽈배기 패턴이 새겨진 흰 항아리 안에 서 있다. 전형적으로 관상용 식물의 화분으로 쓰이는 흰 항아리와 녹색의 다리는 은연중 ‘화분 속 식물’을 연상시킨다. 사진마다 다리를 꼰 자세나 스타킹의 색은 제각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사실을 알기 힘들다. 게다가 화분은 방향만 살짝 틀었을 뿐 그 성질이나 모습 자체에서 변화를 찾을 수 없다. 1) ...

1. 프로젝트 코드: 되기

프로젝트 코드: 되기 강리 붉은 글씨로 날짜를 새기어 넣는 구식 필름 카메라가 간신히 포착한 순간들이 있다. 가장 먼저 길가에 털썩 주저앉은 히스패닉 여성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굽은 등 뒤로 풍성한 컬을 자랑하는 가발이 흐른다. 네온 색상의 탑이 그을린 피부를 강조하고, 볼드한 귀걸이와 목걸이가 시선을 모아 독특한 화장법을 가리킨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런데 화려하게 꾸미고 여름볕을 활보하던 그가 짧은 머리에 투박한 안경을 하고서 파란 벨벳 소파에 누워있다, 여자를 안고. 나는 재빨리 다음 장으로 향했다. 바지를 끌어내리는 여자를 따라가던 노골적인 손이, 이번에는 폴을 잡고 있다. 그는 이제 클럽에서 레오파드 비키니를 입고 섹슈얼한 춤을 춘다.  우연한 순간을 낚아챈 듯한 이미지 속에서 그는  히스패닉 이 되었다가,  부치(Butch) 가 되었다가,  스트리퍼 가 되기도 한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이 되었고, 될 수 있다. 이처럼 니키 리(Nikki S. Lee)는  〈프로젝트(Project)〉(1997-2001) 연작 에서 스냅사진과 퍼포먼스를 이용하여 어떤 무리의 근방역으로 들어간다. 〈히스패닉 프로젝트〉에서 니키 리는 컬러 렌즈를 끼고 피부색을 그을리고 머리를 연장하고 스페니쉬 할렘에서 구입한 옷과 화장품을 사용하여 외양을 변형했을 뿐만 아니라, 뉴욕에서 열린 푸에르토리칸 데이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할렘의 사람들과 생활하며 그들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정황에 접근했다. 히스패닉 코드에 접속하는 니키 리의 이러한 태도는, 히스패닉 양식을 모방한다기보다, ‘히스패닉’이라고 명명된 리듬에 차이를 부여하며 반복하는 리토르넬로(ritornello)¹를 연주하는 일에 가깝다. 리토르넬로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는 ‘사이(entre)’를 생성하고, 여기에서 니키 리는 비로소 히스패닉-되기(devenir)²를 통과한다. 이때 히스패닉-되기가 벌어지는 공간은 니키 리의 ‘몸’이다. 〈프로젝트〉에서 니...

6. 1호 후기

1호 후기 💁 강리 창간호를 준비하면서 땡땡 콜렉티브를 재정비하고 방향성에 관하여 논의하는 과정이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에세이의 첫 문장을 서른 번도 넘게 다시 쓰며 글쓰기에 관해 고민하는 과정은 지난했지만요. 이제는 제가 만든 생각덩어리가, 한겨울에 눈사람을 만들 듯이, 독자의 손을 거치며 불어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바람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신 구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수연 창간호에는 우리가 “예술해야” 하는 이유에 관해 써보았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한없이 깊고 먼 과거로 갈 수도 있는 주제라 처음에는 어깨에 우리 문화예술계 전체를 짊어진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사람마다 예술을 읽고 쓰는 방식과 계기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니 글이 술술 써졌습니다. 그게 바로 ‘알록달록’에 관한 경험이었습니다. 평생 털어놓지 않은 이야기를 구독자분들에게 꺼내고 보니 알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건 정말 재밌는 일이네요. 그래서 앞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땡땡 콜렉티브의 여정에 함께해주신 여러분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 아현 저는 이 시작이 기대됩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하고, 모두가 끊임없이 외쳐온 주장을 당연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루고 싶었습니다. 원래 이 글은 오래 전 메일링 서비스가 생기기 전에 작성되었습니다. 사적인 감정만이 유일했던 이 글이 쓸모있어진 것은 며칠 전 접한 비보 때문입니다. 셀 수 없는 죽음 위에 쓰여진 이 글이 새로운 죽음을 맞이하길 원치 않았습니다. 전 앞으로도 다짐했던 대로 어느 누구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어서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큰 힘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입 대신 손가락으로 내뱉어진 이 말들이 구독자 여러분께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글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시리라 기대합니다. 👻 현지 글을 쓰며 몇 번이나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쳐나온 곳에는 ‘아직 못 다한 말’...

5. 살아남아라, 예대생!(1)

살아남아라, 예대생(1) 알렉시스    낮일까, 밤일까? 중학교 2학년, 미술책에서 접한 질문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1954)에 관한 이 질문은 예술에 대한 나의 시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질문을 접하고나서 당연하게 낮이라 생각했던 그림 속 배경이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어졌다. 이 그림을 시작으로 르네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를 탐구했고, 결국은 예술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큐레이터학과에 편입했다.    드디어 졸업생이 된 2021년, 그렇게 나는 취준생이 되었다. 그리고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취준생이 되면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거나 취업 준비 스터디 모임에 참여하는 등 ‘나 취준생이에요. 건들지 마세요!’라고 알리고 다녀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취준생이 되어보니 내가 경험했던 대학 입시와 같다는 걸 깨달았다. 같은 목표를 향해가는 수 많은 경쟁자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뛰어난 한 사람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여러 시험과 자기소개서 작성이 상위권의 내신과 수능 성적, 화려한 자기소개서로 치환된 것 같았다.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요구사항 가운데에서 ‘완벽’하기란 얼마나 까탈스러운지. 그들이 요구하는 ‘완벽’한 사람이 되면, 학예사가 아니라더라도 어디에서든 남부럽지 않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반적인 취준생들 즉,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들이 정확히 취업을 위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들의 사정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겠거니, 한다. 예술대학 혹은 미술대학을 졸업하면 보통 예술인으로서 활동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기관에 취직할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더 복잡하고 암담하다. 예를 들어, 어느 미술관의 학예사로 취직하고 싶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경력과 학위를 요구할 것이다. 경력을 쌓기 위해서는 인턴이나 예비학예인력이 되어 미술관, 갤러리, 대안공간 등에서 일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준학예사 자격증 필기시험 합격증, 공모전 활동, 외국어...

4. 지워지지 않도록

지워지지 않도록 아현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 『세월』을 영화화한 〈디 아워스 (The Hours)〉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을 비춘다. 원작이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각색한 것에서 출발한 만큼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버지니아 울프의 삶을 조망한다. 특히 그가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2001년 뉴욕의 클라리사 본이 겪은 비극은 불행한 어린 시절에서 시작된 우울감을 절감하게 만든다. 1941년, 1951년, 2001년 이 세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부정당한 존재의 발자취이다. 오롯이 한 사람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사는 것이 금지되었던 시대부터 그 차별의 눈초리가 미묘하고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변모한 시대까지, 그들은 경계 위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증명하고자 했다. 이는 탄디아 페르마디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활동하는 사진 작가  탄디아 페르마디 는 젠더 역할과 개인 경험 간의 충돌과 혼란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첫째 아이가 아들일 경우 불행의 징조’라고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 미신으로 인해 장남 페르마디는 ‘여성적’ 모델을 강요받은 유년기를 겪은 후 사회적으로 정해진 남성으로서의 젠더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모순을 느꼈다. 비록 모순적인 어린 시절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을테지만, 그 시간조차 탄디아 페르마디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냈다. 탄디아 페르마디는 ‘경계 위에 선 존재’로서 자신을 향한 차별과 경계가 선명해지자,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게 되는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여성과 남성, 두 젠더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페르마디는 젠더를 구분짓는 경계를 지우는 순간 지워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자화상 #7〉에서 작가는 스스로를 코드화하여 ‘여성적’ 기호를 입는다. 하의 없이 긴 상의와 인도네시아 전통의상 중 하나인 질밥을 연상시키는 머릿...

3. 문을 두드리며

문을 두드리며 강리     연극 〈비평가〉(이영석 연출, 2018) 는 ‘연극을 연극답게 하는 보다 연극적인 것’에 대해 묻는 메타-연극이다. 성공을 거머쥔 젊은 극작가 스카르파가 비평가 볼로디아의 현관문을 두드리며 시작하는 이 연극은, 비평과 작품이 옥신각신하는 몇몇 순간을 보여준다. 스카르파가 볼로디아에게 자신의 희곡을 제대로 읽어달라고 요청하거나, 볼로디아가 혹평을 철회하지 않는 장면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게다가 볼로디아의 평론이 스카르파를 향한 편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스카르파는 전범(典範)으로 삼았던 볼로디아의 언어를 딛고 일어나 결국에는 자신만의 언어로 연극을 끝맺기까지 한다.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에서 평론은 작품이 발전하기 위한 디딤돌이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평론은 작품을 위해 존재하는가?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비평은 언제나 대상을 필요로 하니까. 하지만 평론은 독자를 향해 뻗어나가는 글이다. 비평은 대체로 대상에 대한 기술, 맥락화, 이론적 해석, 평가를 포함한다. 즉 ‘작품에서 무엇을 감지하였고, 그와 관련한 무엇을 떠올렸으며, 그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고, 무엇을 기준 삼아 평할 것인지’에서 무엇의 자리를 채우는 일이다. 이 작업의 핵심은 ‘무엇’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는지에 있다. 그래서 평론은 그 자체로 완결될 수 없으며, 독자의 사유 속에서 완성된다.    나는 시를 직접 쓰지도 않고, 국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국 시인의 시집에서 권말비평을 즐겨 읽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읽기도 하지만 다툼을 할 때도 많다. 비평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동안, 내가 시와 맺는 관계의 형태를 더듬어 본다. 나의 관점과 태도를 점검하며 정신의 외피를 보듬기도 한다. 결국 나는 나에 대해서 더 잘 알기 위해 평론을 읽는다. 그리고 평론은 어려운 이론을 독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스스로 해명할 수 없는 욕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