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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색해보니 일기도 에세이라고 하더라


검색해보니 일기도 에세이라고 하더라

수연

2021년 4월 2일 금요일
아니, 그렇게 자꾸 쳐다보시면…

흥미로운 글쓰기를 시작했다. A가 단어를 제시하면 B가 작품을 찾는다. C는 그에 관한 글을 에세이로 쓴다. D는 C가 쓴 글을 보고 A가 처음 제시한 단어를 맞히게 될 것이다. 이번에 나는 C의 역할을 맡았다. 전적으로 앞 사람의 결정에 따른 글쓰기다. 작품이 내 마음에 와닿지 않아도 일단 써야 한다. 솔직히 글과 작품만을 보고 이루어진 온갖 추측의 결과가 한 단어에 귀결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지만, 재밌으면 됐지, 뭐. 답을 맞히는 입장은 아니지만 한 번 추측해보자면, ‘응시, 표정, 얼굴, 시선…’ 정도.

그건 그렇고, 그렇게 자꾸 쳐다보시면 부담스러워요.

등장인물의 ‘빤한’ 시선이 부담스럽다. 글을 쓰려면, 작품을 오래도록 보아야 하는데······. 작품은 보는 사람마다 각자의 사연에 따라 감상하기 마련인데, 내 사정을 대입해 표현하자면 一 작품에 묘사된 등장인물의 눈이 글을 쓰라고 재촉하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은 기분이 나지 않으므로 패스.

오늘의 반성 : 글을 못 썼다. 아니 안 썼ㄷ…
내일의 계획 : 얼리버드가 되겠다. (대충 일찍 일어나겠다는 소리)
2021년 4월 4일 일요일
결국 저 눈이 문제야

3시간째. 그냥 보고만 있다. 여전히 올곧은 눈빛이다. 작품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저 시선을 어디선가 보았다. 그 장면을 회고한다. 분명히 작품에 시선을 두고 분석하는 주체는 나다. 그런데 정이지의 〈Season of Fig 3〉는 나를 분석하려 든다. 응시의 대상이 된 나는 끊임없이 분열된다. 살짝 옆으로 튼 얼굴로 감상자를 곧게 바라보는 시선에 미간이 뚫린다. 一 아릿하다. 시선은 미간의 표피를 통과해 회백색 대뇌겉질(두께 2~4mm 정도의 얇은 살점에 불과하지만 기억, 언어 등 인간 활동의 중요 부분을 차지하는 부위)에 도달한다. 자극을 받은 뇌에서 기억이 피어오른다.

기억은 잠시 뒤로 하고 임무로 돌아가자. 무채색 계열의 냉랭한 색채를, 단숨에 그려낸 것 같은 붓질을, 화면을 꽉 채운 얼굴을, 여백을 통해 무언가를 알아내려 애쓴다. 다시 1시간 경과, 마침내 깨닫는다. 그토록 아니라고 하고 뒤로 했던 ‘떠오르는 기억’이 이 작품의 속성이구나.

오늘의 반성 : 얼리버드는커녕 평소보다 늦게 일어남. 어쩐지 일어날 때 상쾌하더라...
내일의 계획 : 내 ‘열정적인’ 타자 탓에 노트북 자판이 빠졌다…ㅎ 수리하러 가야지… (LG서비스센터 16:30 중요★★★)
2021년 4월 6일 화요일
진실만을 답해야 할 것 같은 올곧은 눈이다

경험과 기억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스레 과거로 전환된다. 다양한 감정, 관계, 장소, 물건 등은 점차 잊히고 소멸된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이는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지나친 것은 간헐적으로 돌아오기도 하고 망각으로 남기도 한다. 정이지는 자신의 삶 속 가까이에서 느끼고, 보았던 중요한 순간을 캔버스에 기록한다. 이러한 행위는 순간들이 단순히 기억에서 지워지거나 왜곡될 가능성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감상자는 과거를 재경험하며 현재의 자신을 본다.

일상의 기억에 관해 정이지는 “그런 장면들이 물리적인 몸을 가진 회화가 되어 오래도록 남아 그 시간을 함께한 이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비슷한 기억까지도 환기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다.”고 이야기한다. 정이지가 표현하는 일상은 우리의 기억과 맞물려 중요한 순간이 된다. 우리는 중요한 순간을 인식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과 변화의 순간을 만들기도 한다.

기억의 저편에서 순간을 떠오르게 하는 정이지의 방식은 눈 맞춤이다. 〈Season of Fig 3〉에서 인물의 시선은 그림을 보는 감상자를 향한다. 눈이 휜 정도, 팔자주름, 눈가주름 등이 없는 것으로 보아 무표정이다. 눈빛은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은 채 담담하지만, 살짝 벌어진 입을 보아서는 곧 말을 꺼낼 것 같다. 아무도 시킨 적 없지만, 진실만을 답해야 할 것 같은 올곧은 눈이다. 一 그러고 싶다. 우리는 오늘 처음 만났는데도, 오래 알던 사이 같다.

오늘의 반성 : 원고 마감일. 그러나 마감한 듯 안 한 듯 애매한 완성도
내일의 계획 : 일주일의 시작, 월요일이 오기 전 마지막 주말을 실컷 즐기자!!

2021년 4월 7일 수요일
그날의 ‘나’를 기억함으로써

작품은 순간과 기억을 캔버스에 고정할 뿐일까? 낯익지 않은 순간과 기억도 반복되고 시간이 지나면 쉽게 흩어지기에 정이지는 의식하지 않으면 잊어버릴지도 모를 장면을 그린다. 그림을 보고 있자니 언젠가 경험했던 그림을 닮은 기억이 떠오르고 그들과 내 감정은 다분히 연결된다. 바다에 잠긴 듯 냉담한 색조에, 진실을 요구하고 어쩌면 책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눈빛에 잊을 뻔했던 사건을 떠올린다. 잊어서는 안 되는 한 장면이 중요한 대상으로 기록되면서 과거의 시간은 다른 의미를 품고 되살아난다.

중학교 2학년, 수학여행에서 돌아오던 버스. 3일 간의 여행은 피곤했기에 한두 명을 빼고는 모두 곤히 잠든 상태. 버스 앞쪽에서 백색소음처럼 흘러나오던 뉴스 소리에 나도 잠이 들던 참. 그리고 속보. 잠이 달아났다.

저녁 늦게 집에 도착하니 온가족이 재난 영화라도 보듯, 침몰하는 배를 보고 있었다. 버스에서 보았을 때보다 구조자가 줄어들었다. 그건 오보였구나.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一 뭘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저녁을 먹으면서 한둘씩 구조되는 장면을 보고, 친구들과 카톡하면서 이 이야기를 나누고, 밤에는 무책임한 선장을 질타하고 실책의 원인을 파악하는 뉴스를 보았다. 그렇게 3일, 5일, 1주, 2주.

대국민 사과를 ‘보았다’. 내가 어떤 표정으로 시청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면 〈Season of Fig 3〉에서 진실을 답해야 할 것만 같은 눈빛으로 나를 괴롭게 한 인물은 나였을지도. 그날의 내가 작품이 되어 지금의 나를 본다. 지금의 나는 ‘나(작품)’를 통해 그날의 나를 떠올린다. 과거의 사건에서 의미를 발견할 때, 현재는 새로운 가능성을 불러온다.

기억한 후에 보니 피하려고 했던 이 순간이,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순간이 된다. 작품에 기록된 순간은 과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기억은 현재의 의미를 알아차리게 하고, 다가올 시간을 소중히 여기게 한다.

오늘의 반성 :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고 하면 가만있지 않을 거야
내일의 계획 : 내가 어떤 상태이든 세상은 흘러간다. 정신 바짝 차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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