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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의자가 쏘아올린 작은 별

 

의자가 쏘아올린 작은 별

현지

가보고 싶었던 음식점 근처에 우연히 ‘아마도 예술공간’이 있었다. 때마침 전시 《홀로 작동하지 않는 것들》이 열리고 있었고, 가벼운 마음으로 전시장에 방문했다. 여기도 작품이 있을지 의문을 자아내는 지하 공간으로 내려가니, 전시실에서 은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지하의 눅눅하고 어두운 분위기가 무서운 느낌을 주었으나, 동시에 비현실적인 분위기도 느껴졌다. 약간의 공포를 누르고 전시실 밖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따라가니, 조명이 붙어있는 의자와 감자칩 한 바구니를 마주하게 되었다.

의자의 손잡이와 뼈대에는 나무토막이 덧대어져 있었으며, 그 위로 작은 스탠드 같은 조명이 세워져 자리를 비추고 있었다. 조명 아래로는 작은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의자에 앉아 손만 뻗으면 닿을 위치에 감차칩 한 바구니가 있었다. 의자의 맞은편 바닥에는 은색 별이 붙어있었다. 마지막으로 '바닥에 앉아서 관람하는 작품입니다'라는 문구는 ‘앉으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는 호기심으로 나를 가득 채웠다.

공간을 채운 조명은 불이 꺼진 방을 홀로 밝히는 스탠드를 떠올리게 했다. 빛을 받은 의자는 몇 가지 장치가 달려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골드버그 장치(생김새나 작동원리는 아주 복잡하고 거창하지만 아주 간단한 일을 하는 기계)를 떠올리게 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흔히 보던 녹색 우유 상자가 의자 발 받침대로 설치되어 있었다. 우유 상자를 비집고 나온 실타래들은 마치 딱딱한 플라스틱이 포근한 발 받침대가 된 듯 착시를 불러일으켰다.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커다란 은색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쾅!’ 하는 소리와 함께 깜깜해졌다. 어두움을 무서워하는 나는 “악!” 비명을 지르며 의자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지금이라도 일어나서 나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찰나, ‘지이이잉—’.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나며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있던 별이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별(똥)별을 보기 위해 만든 의자〉에 앉으면 하늘로 올라가는 별만 볼 수 있을 뿐, 떨어지는 별똥별은 볼 수 없었다.

강나영의 〈별(똥)별을 보기 위해 만든 의자〉는 인터랙티브 작품이다. 관객이 의자에 앉아 있어야만 작동하며, 기계적으로 반복해서 작동하지 않는다. 관객이 공간에 진입했을 때, 조명은 전시공간의 초점을 의자에 집중시킨다. 전시공간의 초점은 조명에 의해 의자에 집중된다. 공간에 들어서면서 눈에 들어온 첫 번째 빛은 관객에게 흥미를 유발하여 작품에 참여하게 만든다. 그러나 관객이 의자에 앉는 순간, 조명이 꺼지며 공간의 초점이 사라진다. 잠시 후 켜진 조명은 초점을 별똥별로 이동하게 한다. 첫 번째 빛이 그 역할을 다하면, 암전 후 두 번째 빛이 별똥별을 비춘다. 그리고 마침내 별똥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두운 방에서 작품을 보여주는 것은 공간 전체의 분위기에 큰 차이를 가져온다. 어둠, 소리, 설치물 등 다양한 요소가 빛을 통해 조합되어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고, 관객이 어둠 속을 나아갈 수 있게 한다. 즉, 은은한 조명이 관객을 작품으로 이끌고, 이후 조명이 꺼지고 켜지며 작품에 몰입하게 한다. 조명은 이 작품에서 두 가지 다른 기능을 수행한다. 첫 번째, 관객이 어두운 공간 속의 작품에 집중하게 한다. 불이 꺼진 방 안에서 무언가 보기 위해 불을 켜는 것처럼 조명을 통해 작품을 보여준다. 두 번째, 빛 자체는 작품 속에서 밝혀지는 다른 이야기들을 드러낸다.

또한 조명은 예술과 일상을 합하고 분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관객은 별이 올라가는 동안 어떤 소원을 빌지 궁리하며 별이 끝까지 올라갔을 때 소원을 빌고, 관객이 의자에서 일어나면 암전이 되면서 별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조명은 관객이 떠날 때 다시 꺼지면서 작품과 관객을 분리한다. 이 과정에서 조명은 작품 속으로 불러들인 관객을 일상으로 돌려보낸다.

〈별(똥)별을 보기 위해 만든 의자〉는 관객이 작품에 앉는 직접적인 신체적 행위를 통해 작품과 상호작용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관객을 예술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이때 작품은 순간적으로 반응하여 작동하지만, 작품 자체가 변형되지는 않는다. 관객의 참여는 짧은 순간 이루어지고 완료되며, 참여 방식(앉기)과 결과(움직이는 별똥별)도 예측할 수 있다. 작품이 자아내는 분위기는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동시에 관객과의 소통을 의도하며 상호작용을 통하여 완성되어가는 열린 구조의 예술 작품이다.

강나영은 관객과 무관한 비일상적 전시공간에서 빛, 소리, 소품 등의 정지된 오브제를 차례차례 겹쳐 공간에 배치하는데, 이러한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상하게 하는 움직임은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유발한다. 이 운동성은 작품을 보는 관객의 경험에 의해 가능한 것으로, 관객은 실재하는 장소에서 실제 경험을 통해 이해한다.

이와 더불어 강나영은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나거나 소외된 대상과 장소’를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낭만적인 순간’으로 재해석하여, ‘새로운 장소에 다른 시공간을 들여놓는 방식’을 탐구한다. 작가는 이러한 기다림과 기대, 희망을 ‘도래할 시간’에 대한 물리적 지각이 동반된 작업으로 치환시킨다.

이렇듯 〈별(똥)별을 보기 위해 만든 의자〉는 사람들의 시선에서 벗어난 초록색 플라스틱 우유 상자, 벽돌, 나무토막, 의자 등을 가지고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를 별똥별을 보는 낭만적인 순간으로 재해석하여, 한낮의 반지하 속에 깜깜한 밤의 천문대를 들여놓았다. 이제 관객은 자신의 기억 속에서 그려지는 별똥별의 분위기와 정서를 작품에 투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별(똥)별을 보기 위해 만든 의자〉를 통해 어떠한 순간에 관한 기대, 희망을 그려볼 수있지 않을까?

                      
참고자료
1.정소연, 「현대미술에 나타난 상호작용성의 전개 양상과 그 예술적 적용에 관한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2012
2. 박영란, 「미술에 있어서 상호작용성의 의미」, 『현대미술관 연구』, 제 13집, 국립현대미술관, 2002
3. 박성환, “홀로 작동하지 않는 것(Non-self standings)”, 아마도 예술 공간, 2020
4. Floorrmagazine Issue, “LIGHTING PLAYS A SIGNIFICANT ROLE IN MY ART PRACTICE”,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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