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을 두드리며
강리
연극 〈비평가〉(이영석 연출, 2018)는 ‘연극을 연극답게 하는 보다 연극적인 것’에 대해 묻는 메타-연극이다. 성공을 거머쥔 젊은 극작가 스카르파가 비평가 볼로디아의 현관문을 두드리며 시작하는 이 연극은, 비평과 작품이 옥신각신하는 몇몇 순간을 보여준다. 스카르파가 볼로디아에게 자신의 희곡을 제대로 읽어달라고 요청하거나, 볼로디아가 혹평을 철회하지 않는 장면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게다가 볼로디아의 평론이 스카르파를 향한 편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스카르파는 전범(典範)으로 삼았던 볼로디아의 언어를 딛고 일어나 결국에는 자신만의 언어로 연극을 끝맺기까지 한다.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에서 평론은 작품이 발전하기 위한 디딤돌이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평론은 작품을 위해 존재하는가?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비평은 언제나 대상을 필요로 하니까. 하지만 평론은 독자를 향해 뻗어나가는 글이다. 비평은 대체로 대상에 대한 기술, 맥락화, 이론적 해석, 평가를 포함한다. 즉 ‘작품에서 무엇을 감지하였고, 그와 관련한 무엇을 떠올렸으며, 그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고, 무엇을 기준 삼아 평할 것인지’에서 무엇의 자리를 채우는 일이다. 이 작업의 핵심은 ‘무엇’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는지에 있다. 그래서 평론은 그 자체로 완결될 수 없으며, 독자의 사유 속에서 완성된다.
나는 시를 직접 쓰지도 않고, 국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국 시인의 시집에서 권말비평을 즐겨 읽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읽기도 하지만 다툼을 할 때도 많다. 비평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동안, 내가 시와 맺는 관계의 형태를 더듬어 본다. 나의 관점과 태도를 점검하며 정신의 외피를 보듬기도 한다. 결국 나는 나에 대해서 더 잘 알기 위해 평론을 읽는다. 그리고 평론은 어려운 이론을 독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스스로 해명할 수 없는 욕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나는 스스로 해명할 수 없는 욕망을 앓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러니까 메갈리아 세대의 페미니스트이자 비규범적 욕망을 말하는 퀴어이자 비거니즘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평론을 쓰는 일에도 매력을 느낀다. 비평은 어찌되었던 간에 선택된 대상이 다른 대상보다 더 주목받을 수 있도록 무게를 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고무판과 쇠공을 사용한다. 얇은 고무판 위에 무거운 쇠공을 놓으면 휘듯이 질량이 있는 물체는 공간을 휘어 중력을 발생한다는 시각적 비유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비유는 무거운 별 주변의 물체가 움직이고 변형되는 과정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비평이 대상에 무게를 더하는 일이라면, 주변을 움직이고 변형하는 힘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여기에서 비평의 중력을 소수적으로 사용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여성, 그리고 정상성을 탈각한 괴상한 욕망과 존엄한 비인간의 삶에 기대어 비평하는 세계에서 살겠다.
문득 연극 〈비평가〉의 대사가 떠오른다. “일반적으로 연극에 관한 작품은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한테만 재미있어요.” 아마 비평에 관한 이 글도 비평을 쓰는 사람들한테나 재밌을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당신의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는 비평의 독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고 싶다. 아니면 볼로디아 같은 영향력 있는 비평가가 되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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