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3. 문을 두드리며

문을 두드리며

강리

   연극 〈비평가〉(이영석 연출, 2018)는 ‘연극을 연극답게 하는 보다 연극적인 것’에 대해 묻는 메타-연극이다. 성공을 거머쥔 젊은 극작가 스카르파가 비평가 볼로디아의 현관문을 두드리며 시작하는 이 연극은, 비평과 작품이 옥신각신하는 몇몇 순간을 보여준다. 스카르파가 볼로디아에게 자신의 희곡을 제대로 읽어달라고 요청하거나, 볼로디아가 혹평을 철회하지 않는 장면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게다가 볼로디아의 평론이 스카르파를 향한 편지였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스카르파는 전범(典範)으로 삼았던 볼로디아의 언어를 딛고 일어나 결국에는 자신만의 언어로 연극을 끝맺기까지 한다.


   후안 마요르가의 희곡에서 평론은 작품이 발전하기 위한 디딤돌이다.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평론은 작품을 위해 존재하는가? 고개를 끄덕일지도 모르겠다. 비평은 언제나 대상을 필요로 하니까. 하지만 평론은 독자를 향해 뻗어나가는 글이다. 비평은 대체로 대상에 대한 기술, 맥락화, 이론적 해석, 평가를 포함한다. 즉 ‘작품에서 무엇을 감지하였고, 그와 관련한 무엇을 떠올렸으며, 그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고, 무엇을 기준 삼아 평할 것인지’에서 무엇의 자리를 채우는 일이다. 이 작업의 핵심은 ‘무엇’이 얼마나 설득력을 가지는지에 있다. 그래서 평론은 그 자체로 완결될 수 없으며, 독자의 사유 속에서 완성된다.

   나는 시를 직접 쓰지도 않고, 국문학을 전공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국 시인의 시집에서 권말비평을 즐겨 읽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읽기도 하지만 다툼을 할 때도 많다. 비평에 동의하거나 반대하는 동안, 내가 시와 맺는 관계의 형태를 더듬어 본다. 나의 관점과 태도를 점검하며 정신의 외피를 보듬기도 한다. 결국 나는 나에 대해서 더 잘 알기 위해 평론을 읽는다. 그리고 평론은 어려운 이론을 독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스스로 해명할 수 없는 욕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나는 스스로 해명할 수 없는 욕망을 앓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러니까 메갈리아 세대의 페미니스트이자 비규범적 욕망을 말하는 퀴어이자 비거니즘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으로서 평론을 쓰는 일에도 매력을 느낀다. 비평은 어찌되었던 간에 선택된 대상이 다른 대상보다 더 주목받을 수 있도록 무게를 더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고무판과 쇠공을 사용한다. 얇은 고무판 위에 무거운 쇠공을 놓으면 휘듯이 질량이 있는 물체는 공간을 휘어 중력을 발생한다는 시각적 비유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이러한 비유는 무거운 별 주변의 물체가 움직이고 변형되는 과정을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비평이 대상에 무게를 더하는 일이라면, 주변을 움직이고 변형하는 힘이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여기에서 비평의 중력을 소수적으로 사용하고 싶다. 더 많은 사람이 역사에 기록되지 않는 여성, 그리고 정상성을 탈각한 괴상한 욕망과 존엄한 비인간의 삶에 기대어 비평하는 세계에서 살겠다.

   문득 연극 〈비평가〉의 대사가 떠오른다. “일반적으로 연극에 관한 작품은 연극을 만드는 사람들한테만 재미있어요.” 아마 비평에 관한 이 글도 비평을 쓰는 사람들한테나 재밌을런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당신의 현관문을 두드리고 있는 비평의 독자가 되어 달라고 요청하고 싶다. 아니면 볼로디아 같은 영향력 있는 비평가가 되어도 좋겠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2. 우리는 화초이고 개구리이다

  우리는 화초이고 개구리이다 수연 2020년 여름, 엄마는 직장 동료한테 받았다며 ‘크루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열대 식물을 가져왔다. 엄마는 바쁜 직장 생활에도 크루시아에게 물 주기를 잊지 않았지만, 날씨가 추워지면서 크루시아는 모두가 집을 비웠을 때의 한기를 견디지 못했다. 여름 방학 때 크루시아를 처음 보고 겨울 방학을 맞이해 다시 얼마간 본가에 다녀온 나는 파릇하던 식물이 반년 만에 시들어가던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좁은 화분에 겨우 뿌리를 내리고 힘겹게 자리 잡은 식물은 인간의 미적 관상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손수 길러진다. 식물은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지만, 이는 화분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인간의 관리와 제약 아래 이루어진다. 화분 속 식물에서 현대 사회의 그늘 아래 발버둥 치는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개인으로서 인간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사회 체제의 존속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하며, 사회나 특정 집단의 규범에 따라 규격화되기도 한다.  화분에 심겨 길러지는 식물과 사회의 흐름 속에 힘없이 내던져진 인간.  현대인과 식물의 닮은꼴을 인지한 계기는  장성은의  〈 flowerpot〉 연작 이었다. 연작은 2009년에 제작된 4장의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작품의 크기는 45X33.6cm로 동일하며, 모두 보존성을 높인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Archival Pigment Print)로 인쇄되었다. 동일한 크기와 인쇄 기법으로 제작된 4장의 사진에는 엇비슷한 광경이 포착되어 있다. 먼저 녹색 스타킹을 신은 사람이 다리를 꼬고 꽃문양과 꽈배기 패턴이 새겨진 흰 항아리 안에 서 있다. 전형적으로 관상용 식물의 화분으로 쓰이는 흰 항아리와 녹색의 다리는 은연중 ‘화분 속 식물’을 연상시킨다. 사진마다 다리를 꼰 자세나 스타킹의 색은 제각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사실을 알기 힘들다. 게다가 화분은 방향만 살짝 틀었을 뿐 그 성질이나 모습 자체에서 변화를 찾을 수 없다. 1) ...

0. HOLDING POINT

HOLDING POINT 글. 강리 반갑습니다, 땡땡 콜렉티브의 기획자로서 첫 인사말을 건넵니다. 지난 2020년 12월, 저는 다소 충동적으로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함께 미술 비평 연습할 사람을 구”한다는 글을 올렸습니다. 운이 좋게도 꽤나 많은 연락을 받았고, 그 중 세 사람과 땡땡 콜렉티브를 꾸렸습니다. 수요일 저녁마다 예술이론과 비평에 관하여 함께 읽고 서로의 글쓰기를 점검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의 담장 바깥에서는 땡땡 콜렉티브의 활동이 어떻게 읽힐지 궁금해졌습니다. 그래서 소셜 계정을 개설하고, 메일링 서비스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땡땡 콜렉티브는 지금 소통을 기반으로 한 열린 공동체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습니다. 메일링 서비스가 일방적인 정보 전달이 아닌, 미술과 텍스트를 매개로 한 관계 맺기가 되길 바랍니다. 그에 걸맞게 창간호에는 네 사람이 각자 미술 혹은 미술계와 관계 맺게 된 사정에 관하여 쓴 에세이를 수록하였습니다. 네 편의 에세이는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서 각자에 대한 소개이기도 하지만, 땡땡 콜렉티브가 앞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의 방향이기도 합니다. 땡땡 콜렉티브는 '땡땡'으로 비워진 자리를 함께 채워나가는 과정을 경계 없는 글쓰기를 통해 소개하고자 합니다. 땡땡 콜렉티브의 이름은 빈 칸을 가르켜 '땡땡'이라고 부르는 언어습관에서 출발했습니다. 아직 '땡땡'에 무엇이 자리할지는 모르겠습니다. 막연하게 어떤 주제나 관점, 대상이 될 것이라 추측하지만, 때로는 전혀 다른 길로 향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땡땡'의 가능성에 기대어 길어올린 사유가 우리의 목마름을 해갈하였듯, 누군가의 필요에도 가닿을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땡땡 콜렉티브는 홀딩 포인트에 있습니다. ‘홀딩 포인트(Holding Point)’는 관제탑에서 이륙 허가를 받기 전 활주로에서 대기하는 순간을 이르는 항공 용어입니다. 땡땡 콜렉티브는 지금 여기에서 구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관제탑 삼아...

2. 운명보다 가까운 만남

운명보다 가까운 만남 현지    예술 작품에 대해 떠올리면, 생각나는 작가나 작품이 있나요? 있다면,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과의 첫 만남은 어땠나요? 작품을 통해 작품 속 인물이 나에게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경험이 있나요? 저는  에드바르 뭉크(1863~1944)의 〈사춘기〉(1894~1895) 를 보며 제 자신을 비추어 보았던 순간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이 작품을 처음 본 순간은 필기구와 책들이 어질러져 있는 책상 위, 방구석에 펼쳐진, 이은기·김미정의 『서양미술사』 436쪽이었습니다. 분명 낭만적인 곳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듯한 특별한 만남은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이 제 마음속으로 들어오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뭉크의 〈사춘기〉 속 어린 소녀는 딱딱해 보이는 침대에 어딘가 불편한 듯 경직된 자세로 걸터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어깨를 웅크린 채 양손을 포개며 몸을 슬며시 가리고 있습니다. 그 뒤로 소녀의 오른편에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는, 기이한 모양으로 몸에서 빠져나온 영혼의 형태 같습니다. 마치 소녀의 몸에서 삐져나온 두려운 마음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또한 거친 붓 터치와 중후한 느낌의 색감은 사춘기를 맞아 여러 변화를 마주친 소녀의 불안한 마음을 한층 두껍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제 시선을 붙잡은 것은 소녀의 눈과 미묘한 표정이었습니다. 소녀의 눈동자 속에는 걱정, 당황, 다부진 다짐 그리고 싱숭생숭함이 한대 뒤엉켜있었습니다. 저는 이 모습이 새로운 출발선에 섰을 때 제 모습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게 될 것인지에 대한 걱정과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의 당황, 그럼에도 끝까지 해내 보겠다는 다부진 결심과 어쨌든 새로운 시작이 가져다주는 두근거림과 어수선한 마음을 소녀의 눈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공부를 위해 아무 기대 없이 펼친 책 속의 작품에 제가 빠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