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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는꿈도잘안꾸는걸


나는꿈도잘안꾸는걸

현지

짙게 깔린 어둠을 배경으로 한 여자가 새하얀 옷을 입고 침대 위에 가로로 걸쳐 누워있다. 상반신은 완전히 뒤로 젖혀져 있고 팔과 머리는 침대 밑으로 늘어져 있다. 마치 깊게 잠든 듯하지만, 중앙의 커튼 사이로 여자를 바라보는 말과 탐욕스러운 표정의 괴물을 보아하니 좋은 꿈을 꾸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원숭이 모습을 한 괴물은 그녀를 먹잇감처럼 바라보며 배 위에 앉아 여자를 누르고 있다. 이 괴물은 악마로, 서구 전설 속에 주로 등장하며 특히 혼자 잠자는 여성의 꿈속에 나타나 겁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침실의 커튼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말의 하얀 눈은 섬뜩하다. 벌름거리는 콧구멍, 살짝 벌어져 있는 입, 바짝 서 있는 귀는 말이 어떤 상태인지를 보여준다. 말 또한 성적 에너지를 상징하여, 여자가 꿈속에서 유린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존 헨리 푸셀리(1741~1825)는 성적 충동이 불러일으킨 흥분과 쾌락, 공포와 두려움을 담아 그림을 그렸다. 무의식의 영역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악몽〉을 보고 있으면, 오싹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어 그림을 오랫동안 살펴보는 것이 어려웠다. 특히 말에 눈길이 닿으면 얼마 못 가 화면을 꺼야 했다. 나는 악몽을 거의 꾸지 않는다. 꿈을 꾸지 않는 편이며, 꿈을 꾸더라도 금방 잊어버린다. 그래서 꿈보다, 악몽 같은 현실에 압도되는 순간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를테면 버스를 놓쳐서 약속한 시각에 늦을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사실 늦었다) 한참 기다린 버스가 정류장에 도달했을 때, 집에 두고 온 챙겨야 했던 무언가가 생각난다. 시간 약속은 어기고, 물건은 빠뜨리고. 정말 중요한 물건이 아니라면 버스에 탑승하지만, 악몽이라면 깨어나고 싶은 순간이다. 이와 함께 코로나 시대의 대학생에게 사소한 현실에서의 악몽은 과제가 쏟아질 때이다. 과제를 받았을 때는 분명 넉넉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밀려든 과제를 보며 이게 악몽이라면 제발 없어지길 하고 생각하곤 한다. 미루고 미뤄 지각 제출의 순간까지 다가오면 이 또한 끔찍한 순간일 것이다. (그러나 이 악몽을 ‘아직은 경험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과제를 제출하지 못하는 것은 깨어날 수 없는 악몽이니까)

나는 현재 예술이론을 전공하고 있는 학부생이다. 이와 관련된 악몽 같은 시간은 언제였을까? 어떤 작품이 마음에 와닿았음에도 ‘정말 좋았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 이 좋음을 전달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지만, 설명할 수 없을 때의 괴로움. 작품 분석문 또는 비평문을 쓸 때 마주하는 무지와 한계. 이때마다 공부할 것을 다짐하지만 좀처럼 잡히지 않는 미술. 주변에서 전시, 작가, 작품, 공연 등에 관하여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이야기할 때, 드는 생각. ‘내가 좋아하는 것은 뭘까? 무엇을 얘기해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것조차 잘 모르는 나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복잡해지기도 한다. 이런 내가 전공 공부를 계속해도 될지, 전공을 갖고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게 될지, 나는 아직도 다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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