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워지지 않도록
아현
마이클 커닝햄의 소설 『세월』을 영화화한 〈디 아워스 (The Hours)〉는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 〈댈러웨이 부인〉을 중심으로 각기 다른 세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을 비춘다. 원작이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각색한 것에서 출발한 만큼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은 버지니아 울프의 삶을 조망한다. 특히 그가 자살에 이를 수밖에 없었던 상황과 2001년 뉴욕의 클라리사 본이 겪은 비극은 불행한 어린 시절에서 시작된 우울감을 절감하게 만든다. 1941년, 1951년, 2001년 이 세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부정당한 존재의 발자취이다. 오롯이 한 사람으로서, 레즈비언으로서 사는 것이 금지되었던 시대부터 그 차별의 눈초리가 미묘하고 비가시적인 방식으로 변모한 시대까지, 그들은 경계 위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끊임없이 증명하고자 했다. 이는 탄디아 페르마디 또한 마찬가지이다.
인도네시아 반둥에서 활동하는 사진 작가 탄디아 페르마디는 젠더 역할과 개인 경험 간의 충돌과 혼란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규명하고자 노력한다. 그는 ‘첫째 아이가 아들일 경우 불행의 징조’라고 믿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이 미신으로 인해 장남 페르마디는 ‘여성적’ 모델을 강요받은 유년기를 겪은 후 사회적으로 정해진 남성으로서의 젠더 역할을 수행하는 것에 모순을 느꼈다. 비록 모순적인 어린 시절은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을테지만, 그 시간조차 탄디아 페르마디는 자기 자신으로 살아냈다. 탄디아 페르마디는 ‘경계 위에 선 존재’로서 자신을 향한 차별과 경계가 선명해지자,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게 되는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여성과 남성, 두 젠더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페르마디는 젠더를 구분짓는 경계를 지우는 순간 지워질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자화상 #7〉에서 작가는 스스로를 코드화하여 ‘여성적’ 기호를 입는다. 하의 없이 긴 상의와 인도네시아 전통의상 중 하나인 질밥을 연상시키는 머릿수건을 착용함으로써 유년기부터 고착된 자아를 드러낸다. 〈자화상〉 연작은 ‘여성인 자아’를 체현하며 고뇌에 빠지고 피폐해지며 우울감에 빠지는 작가를 묘사하고 있다. ‘여자’아이들이 가지고 놀 법한 아기 인형을 포착한 장면부터 TV 앞에 앉아 담배를 손에 쥐고 멍하니 TV를 보거나 하품을 하는 장면까지. 극적인 사건이 없는 사진들은 작가의 일상 장면에 담긴 외로움, 쓸쓸함, 허망함을 함축한다. 그러나 서사는 곧 그 기호들을 벗는다. 반 바지를 입은 몸으로 침대 위에 뛰어드는 장면과 신체의 그림자를 있는 그대로 찍은 사진을 통해 〈자화상〉 연작은 전환점을 맞이한다. 고뇌와 혼돈, 우울감이 가득했던 연작의 분위기는 침대에 뛰어드는 페르마디의 모습으로 환기된다. 그간의 마음의 짐을 벗어던지고 힘껏 공중에 떠오른 작가의 모습은 자유와 희망을 기대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작가는 어떠한 기호도 걸치지 않은 나체의 형상을 통해 자유를 소망한다.
우리는 작가가 어떤 젠더를 선택했는지, 혹은 선택 외의 다른 방법을 택했을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여성과 남성, 이분화된 젠더 모두를 수행하며 반기를 드는 모습은 성별의 다양성을 제기한다. 〈자화상〉이라는 보편적이고 진부한 제목은 쉽게 용인될 수 없고 퀴어(queer)한 서사를 한 명이라도 더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든다. 또한 자아에 대한 탐구를 가리키는 ‘자화상’을 보여줌으로써 개인적 자아와 사회적 자아의 긴밀한 관계성을 실험한다. 두 개의 범주가 아닌 많은 범주가 공존할 수 있는 세상을 꾸릴 수 있고, 어느 누구도 부정되지 않고 숨 쉬며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있다면 어떨까? 아마도 그곳에서는 외적인 모습과 미적 기준에 관한 편견과 차별이 없으리라 믿는다.
다양성이라는 논의가, 말이, 단어가 진부해진 세상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는 다양한 사람들을, 즉 정상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람들을 거부하고 지운다.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부정 당한 사람들은 죽음이 삶보다 더 쉬운 방법이라 여기게 된다. 인간은 무릇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곳에서는 존재가치를 찾을 수 없다.
나는 인생이라는 과제가 버거울 때가 많았다. 이성애 남성중심적인 사회가 정한 기준은 나를 ‘조폭 마누라’, ‘뚱뚱한 아이’, ‘다리털 있는 여자’, ‘못생긴 여자’ 등등으로 명명하고 억압했으며 갖은 모욕과 차별을 받도록 방치했다. 그럴 때마다 사회를 탓하는 것보다 자신을 혐오하고 채찍질하는 일이 더 쉬워서 곧잘 자기혐오를 했었다. 자신을 혐오하는 행동은 늘 죽음을 소개했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차마 죽지 못했었다. 영화 〈디 아워스〉에서 로라 브라운이 가족으로부터 도망친 이유로 “죽음 속에서 전 삶을 선택했어요”라 답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나는 절망의 끝에서 사회가 잘못 되었다고, 나의 생각이 결코 틀리지 않았다고 격려받았다.
나는 꿈꾼다. 나와 수 많은 소수자들이, 특히 로라 브라운같은 사람들이 말했던 죽음과도 같았던 삶이 더 이상은 되풀이 되지 않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 비합리적인 차별과 억압이 해소될 순간이 당장 내일이길 바란다. 어느 누구도 상처받지 않으며 온전한 일생을 누릴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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