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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예술 혐오


예술 혐오

 아현

마이클 히스는 2002년 11월 3일자 《더메일온선데이 the Mail on Sunday》에 한 만평을 실었다. 한 남자가 미술 작품을 보며 깜짝 놀라는 장면이 담긴 그림으로, 작품 옆에는 터너 상을 받은 작품이 테이트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음을 명시하는 팻말이 있다. 지루함을 느끼는 남자가 감상하는 작품에는 이런 글이 잔뜩 적혀있다. “여기서 하는 말은 전부 헛소리예요! 예술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속임수와 다를 게 없다고요. (…) 여하튼 당신, 그걸 보러 온 거군요. 그래서 그 바보가 누구던가요? 기왕 여기 온 김에 시원한 우리 레스토랑에 들어와서 산뜻한 화이트 와인 한 병 곁들이며 점심이나 먹는 건 어떨까요?”¹

‘더 메일 온 선데이’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영국의 신문사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요일에 신문을 간행하며 영국인이 가장 많이 읽는 신문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신문사에서 ‘예술’을 꼬집는 만평이 실렸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예술을 ‘예술’로 떠받드는 이들을 겨냥하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예술은 대중과 멀어진 것 같다. 미술사를 공부하면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선사시대의 동굴벽화는 주거공간과 밀접한 곳에서 시작되었지만(호모사피엔스의 생활 양식상 어쩔 수 없는 결과였을 테지만 넘어가도록 한다), 현재 예술은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유명한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가서 전시를 감상해보자. 여기서 또 다른 조건으로 당신은 예술을 따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라 가정해보자. 그런 당신이 입장한 전시장의 장면은 참 낯설다. 작품 하나하나에 달린 캡션을 봐도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고, 도슨트 해설이나 리플렛, 월 텍스트를 읽으면 전문 용어와 미술사에 대한 전문 지식이 요구된다. 분명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나 복잡한 현대 사회에 관해서 말하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이는 비단 비전공자의 상황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도 한 작품을, 전시를 감상하기 위해서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 아직도 ‘예술’은 자기만의 리그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런 거리를 좁히려는 과거와 지금 미술관들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태도는 일관적이다.

그렇지만 예술을 영화로 대치하면 의미가 달라질 수 있다. TV, 영화관, 스마트폰 앱 등을 통해 쉽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는 대중 예술이다. 그리고 영화는 미술 다음으로 대부분의 국가에서 허용하는 예술 분야이다. 영화의 탄생과 발전은 산업화와 연관 짓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발전은 대중을 더욱 끌어들이고 심지어는 정치 도구로도 사용되면서 자본주의의 산물과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다. 바로 이런 차이점이 ‘예술’과 영화의 대중과의 거리를 벌려 놓았다고 본다.

영화에도 많은 장르와 분류 체계가 있다. 대중성이 강한 장르와 ‘예술’성이 강한 장르 등으로 말이다. 하지만 영화인들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교묘히 즐길 수 있는 방책을 내놓았다. 바로 영화제라는 또 다른 영화의 연장선, 쇼 비즈니스와 엔터테인먼트가 혼재한 공간을 구축해 상을 수여하는 시상식에서 그치지 않고 축제로 탈바꿈시켰다.

그렇다면 첫 문단의 만평에서 지목된 대상(여기)은 누구인가? 나는 이것의 범주를 미술계라고 생각한다. 그중에서도 미술을 ‘미술’로 떠받드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 혹은 전문가들. 미술을 숨 막힐 듯이 잘 짜인 새하얗고 정교한 공간에 박제하도록 지시하는 사람들. 고리타분하고 비도덕적인 관습을 전통이라 여기며 고집하는 사람들. 그래서 새로운 물결의 흐름이 달갑지 않은 사람들.

마지막 표현은 꼭 미술계 종사자들에게만 해당되지 않는다. 어느 사회든 항상 사라져야 할 관습을 전통이라 우기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기존의 방식을 고집한다 해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에도 옛것을 곧 법이라 여긴다. 하지만 헌법도 지속해서 개정되고, 심지어 시대에 발맞춰 새로운 법안이 제정되기까지 한다. 법 자체의 길고 두꺼운 역사에 비하면 아주 티끌에 불과하지만 새로운 역사는 쓰이고 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의 시대와 걸맞은 법안이 제정될 수 있도록 분투하며 살아가면 된다.

                  
각주
¹ 『음악 혐오』, 파스칼 키냐르(김유진 옮김, 프란츠, 2017) 에서 제목을 차용했다.

² 『현대미술은 처음인데요』, 안휘경, 제시카 체라시(조경실 옮김, 행성B잎새, 2017), 1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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