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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1호 후기

1호 후기

💁 강리

창간호를 준비하면서 땡땡 콜렉티브를 재정비하고 방향성에 관하여 논의하는 과정이 무척이나 즐거웠습니다. 에세이의 첫 문장을 서른 번도 넘게 다시 쓰며 글쓰기에 관해 고민하는 과정은 지난했지만요. 이제는 제가 만든 생각덩어리가, 한겨울에 눈사람을 만들 듯이, 독자의 손을 거치며 불어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바람을 가능하게 만들어주신 구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수연

창간호에는 우리가 “예술해야” 하는 이유에 관해 써보았습니다. 깊이 생각하면 한없이 깊고 먼 과거로 갈 수도 있는 주제라 처음에는 어깨에 우리 문화예술계 전체를 짊어진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사람마다 예술을 읽고 쓰는 방식과 계기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나니 글이 술술 써졌습니다. 그게 바로 ‘알록달록’에 관한 경험이었습니다. 평생 털어놓지 않은 이야기를 구독자분들에게 꺼내고 보니 알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들려주는 건 정말 재밌는 일이네요. 그래서 앞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땡땡 콜렉티브의 여정에 함께해주신 여러분께 감사함을 전합니다.

🌿 아현

저는 이 시작이 기대됩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연하고, 모두가 끊임없이 외쳐온 주장을 당연하지 않은 방식으로 다루고 싶었습니다. 원래 이 글은 오래 전 메일링 서비스가 생기기 전에 작성되었습니다. 사적인 감정만이 유일했던 이 글이 쓸모있어진 것은 며칠 전 접한 비보 때문입니다. 셀 수 없는 죽음 위에 쓰여진 이 글이 새로운 죽음을 맞이하길 원치 않았습니다. 전 앞으로도 다짐했던 대로 어느 누구에게 해를 가하지 않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말에는 힘이 있어서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큰 힘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입 대신 손가락으로 내뱉어진 이 말들이 구독자 여러분께 잘 전달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글을 읽고 난 후의 감상을 어떤 방식으로든 표현하시리라 기대합니다.

👻 현지

글을 쓰며 몇 번이나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쳐나온 곳에는 ‘아직 못 다한 말’과 ‘글쓰기 빼고는 다 재미있어!’가 저를 기다리더군요. 방황하다가 돌아와 보니, 아쉬움 하나와 새로움 하나가 남아 있었습니다. 이 흔적들이 궁금하시다면, 다음 후기에 공개하겠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인생 작품과 그 이유가 궁금합니다. 피드백을 통해 공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여러분의 답변 기다리고 있을께요.

🏂 알렉시스

많은 분들이 제 글을 읽고 궁금해 하실 ‘그 전시’는 복합문화공간 피크닉에서 2018년에 했었던 《류이치 사카모토 Ryuichi Sakamoto: LIFE, LIFE》 입니다. 모든 면에서 완벽했던 전시라고 할수는 없지만, 음악을 온전히 전시장에서 감상할 수 있었던 점, 음악이 어떻게 조형예술 작품으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던 점, 류이치 사카모토라는 사람과 피크닉이라는 공간의 조화가 절묘했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입니다. 솔직하게 이 시리즈가 얼마나 지속될지는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간간이 나오는 ‘살아남아라 예대생!’의 소식이 ‘살아남아라 인턴/예비학예인력!’, ‘살아남았다 예대생!’이 되는 순간까지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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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나는꿈도잘안꾸는걸

나는꿈도잘안꾸는걸 현지 짙게 깔린 어둠을 배경으로 한 여자가 새하얀 옷을 입고 침대 위에 가로로 걸쳐 누워있다. 상반신은 완전히 뒤로 젖혀져 있고 팔과 머리는 침대 밑으로 늘어져 있다. 마치 깊게 잠든 듯하지만, 중앙의 커튼 사이로 여자를 바라보는 말과 탐욕스러운  표정의 괴물을 보아하니 좋은 꿈을 꾸고 있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원숭이 모습을 한 괴물은 그녀를 먹잇감처럼 바라보며 배 위에 앉아 여자를 누르고 있다. 이 괴물은 악마로, 서구 전설 속에 주로 등장하며 특히 혼자 잠자는 여성의 꿈속에 나타나 겁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침실의 커튼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말의 하얀 눈은 섬뜩하다. 벌름거리는 콧구멍, 살짝 벌어져 있는 입, 바짝 서 있는 귀는 말이 어떤 상태인지를 보여준다. 말 또한 성적 에너지를 상징하여, 여자가 꿈속에서 유린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존 헨리 푸셀리(1741~1825)는 성적 충동이 불러일으킨 흥분과 쾌락, 공포와 두려움을 담아 그림을 그렸다. 무의식의 영역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악몽〉 을 보고 있으면, 오싹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어 그림을 오랫동안 살펴보는 것이 어려웠다. 특히 말에 눈길이 닿으면 얼마 못 가 화면을 꺼야 했다. 나는 악몽을 거의 꾸지 않는다. 꿈을 꾸지 않는 편이며, 꿈을 꾸더라도 금방 잊어버린다. 그래서 꿈보다, 악몽 같은 현실에 압도되는 순간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이를테면 버스를 놓쳐서 약속한 시각에 늦을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사실 늦었다) 한참 기다린 버스가 정류장에 도달했을 때, 집에 두고 온 챙겨야 했던 무언가가 생각난다. 시간 약속은 어기고, 물건은 빠뜨리고. 정말 중요한 물건이 아니라면 버스에 탑승하지만, 악몽이라면 깨어나고 싶은 순간이다. 이와 함께 코로나 시대의 대학생에게 사소한 현실에서의 악몽은 과제가 쏟아질 때이다. 과제를 받았을 때는 분명 넉넉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마감일이 다가올수록 밀려든 과제를 보며 이게 악몽이라면 제발 없어지길 하고 생각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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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화초이고 개구리이다 수연 2020년 여름, 엄마는 직장 동료한테 받았다며 ‘크루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열대 식물을 가져왔다. 엄마는 바쁜 직장 생활에도 크루시아에게 물 주기를 잊지 않았지만, 날씨가 추워지면서 크루시아는 모두가 집을 비웠을 때의 한기를 견디지 못했다. 여름 방학 때 크루시아를 처음 보고 겨울 방학을 맞이해 다시 얼마간 본가에 다녀온 나는 파릇하던 식물이 반년 만에 시들어가던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좁은 화분에 겨우 뿌리를 내리고 힘겹게 자리 잡은 식물은 인간의 미적 관상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손수 길러진다. 식물은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지만, 이는 화분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인간의 관리와 제약 아래 이루어진다. 화분 속 식물에서 현대 사회의 그늘 아래 발버둥 치는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개인으로서 인간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사회 체제의 존속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하며, 사회나 특정 집단의 규범에 따라 규격화되기도 한다.  화분에 심겨 길러지는 식물과 사회의 흐름 속에 힘없이 내던져진 인간.  현대인과 식물의 닮은꼴을 인지한 계기는  장성은의  〈 flowerpot〉 연작 이었다. 연작은 2009년에 제작된 4장의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작품의 크기는 45X33.6cm로 동일하며, 모두 보존성을 높인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Archival Pigment Print)로 인쇄되었다. 동일한 크기와 인쇄 기법으로 제작된 4장의 사진에는 엇비슷한 광경이 포착되어 있다. 먼저 녹색 스타킹을 신은 사람이 다리를 꼬고 꽃문양과 꽈배기 패턴이 새겨진 흰 항아리 안에 서 있다. 전형적으로 관상용 식물의 화분으로 쓰이는 흰 항아리와 녹색의 다리는 은연중 ‘화분 속 식물’을 연상시킨다. 사진마다 다리를 꼰 자세나 스타킹의 색은 제각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사실을 알기 힘들다. 게다가 화분은 방향만 살짝 틀었을 뿐 그 성질이나 모습 자체에서 변화를 찾을 수 없다.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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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혐오  아현 마이클 히스는 2002년 11월 3일자 《더메일온선데이 the Mail on Sunday》에 한 만평을 실었다. 한 남자가 미술 작품을 보며 깜짝 놀라는 장면이 담긴 그림으로, 작품 옆에는 터너 상을 받은 작품이 테이트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음을 명시하는 팻말이 있다. 지루함을 느끼는 남자가 감상하는 작품에는 이런 글이 잔뜩 적혀있다. “여기서 하는 말은 전부 헛소리예요! 예술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섯 살짜리 어린애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하는 속임수와 다를 게 없다고요. (…) 여하튼 당신, 그걸 보러 온 거군요. 그래서 그 바보가 누구던가요? 기왕 여기 온 김에 시원한 우리 레스토랑에 들어와서 산뜻한 화이트 와인 한 병 곁들이며 점심이나 먹는 건 어떨까요?”¹ ‘더 메일 온 선데이’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영국의 신문사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요일에 신문을 간행하며 영국인이 가장 많이 읽는 신문이기도 하다. 바로 그런 신문사에서 ‘예술’을 꼬집는 만평이 실렸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예술을 ‘예술’로 떠받드는 이들을 겨냥하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예술은 대중과 멀어진 것 같다. 미술사를 공부하면 가장 먼저 배우게 되는 선사시대의 동굴벽화는 주거공간과 밀접한 곳에서 시작되었지만(호모사피엔스의 생활 양식상 어쩔 수 없는 결과였을 테지만 넘어가도록 한다), 현재 예술은 일상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유명한 미술관이나 갤러리에 가서 전시를 감상해보자. 여기서 또 다른 조건으로 당신은 예술을 따로 공부하지 않은 사람이라 가정해보자. 그런 당신이 입장한 전시장의 장면은 참 낯설다. 작품 하나하나에 달린 캡션을 봐도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고, 도슨트 해설이나 리플렛, 월 텍스트를 읽으면 전문 용어와 미술사에 대한 전문 지식이 요구된다. 분명 인류의 보편적인 이야기나 복잡한 현대 사회에 관해서 말하는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이는 비단 비전공자의 상황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예술을 공부하는 사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