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5. 살아남아라, 예대생!(1)

살아남아라, 예대생(1)

알렉시스
   낮일까, 밤일까? 중학교 2학년, 미술책에서 접한 질문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1954)에 관한 이 질문은 예술에 대한 나의 시각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질문을 접하고나서 당연하게 낮이라 생각했던 그림 속 배경이 밤인지, 낮인지 알 수 없어졌다. 이 그림을 시작으로 르네 마그리트와 초현실주의를 탐구했고, 결국은 예술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큐레이터학과에 편입했다.

   드디어 졸업생이 된 2021년, 그렇게 나는 취준생이 되었다. 그리고 인생의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취준생이 되면 공무원 시험 공부를 하거나 취업 준비 스터디 모임에 참여하는 등 ‘나 취준생이에요. 건들지 마세요!’라고 알리고 다녀야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취준생이 되어보니 내가 경험했던 대학 입시와 같다는 걸 깨달았다. 같은 목표를 향해가는 수 많은 경쟁자들 그리고 그들 중에서 뛰어난 한 사람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하는 여러 시험과 자기소개서 작성이 상위권의 내신과 수능 성적, 화려한 자기소개서로 치환된 것 같았다. 어지러울 정도로 많은 요구사항 가운데에서 ‘완벽’하기란 얼마나 까탈스러운지. 그들이 요구하는 ‘완벽’한 사람이 되면, 학예사가 아니라더라도 어디에서든 남부럽지 않게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반적인 취준생들 즉, 대학을 갓 졸업한 사람들이 정확히 취업을 위해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도 그들의 사정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겠거니, 한다. 예술대학 혹은 미술대학을 졸업하면 보통 예술인으로서 활동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기관에 취직할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더 복잡하고 암담하다. 예를 들어, 어느 미술관의 학예사로 취직하고 싶다고 가정해보자. 아마도 경력과 학위를 요구할 것이다. 경력을 쌓기 위해서는 인턴이나 예비학예인력이 되어 미술관, 갤러리, 대안공간 등에서 일해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기 위해서는 준학예사 자격증 필기시험 합격증, 공모전 활동, 외국어 자격증, 디자인 툴을 다루는 능력, 미술관이나 갤러리 등에서 일했던 경험, 그리고 예술 관련 학위 따위가 필요하다. (게다가 학예사의 자리는 암묵적으로 석사 학위를 요구한다.) 심지어 이러한 요건은 해가 갈수록 늘어만 간다. 짐작이 되는가? 얼마나 악독한지?

   그렇다고 학예사나 큐레이터가 높은 연봉을 받는 직업도 아니다. 고학력에 박봉. 어쩌면 모든 전시기획자 특히 현대미술 전시기획자들은 “성채”에 산다는 존 버거의 글이 아직까지도 유효할런지도 모른다. 미술관 지붕 아래 예술작품을 소유함으로써 생기는 특권이 엄중한 공적 책임으로서 자신들에게 맡겨졌다는 자부심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미술계 말이다. 어쩌면 그 미술계의 공적을 보며 감탄하고, 그 미술계가 일하는 모습에 반해 이 길을 선택한 내가 더 모순적이겠다.

   무엇이 나를 이렇게 괴로운 기로에 놓았냐고 묻는다면, 한 전시가 떠오른다. 정확한 날짜는 몰라도 그 전시를 본 날의 날씨와 옷차림, 동행인의 반응을 정확히 기억한다. 그 무렵의 나는 영화과 진학을 준비하다가 반복되는 불합격과 좌절을 겪었다. 그래서인지 예술계에 발 딛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러한 와중에도 전시는 예상을 뛰어넘을 만큼 나를 매료시켰다.

   그 날은 감사하게 여긴다. 그 전시를 봤기 때문에 큐레이터가 되기로 결심했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여 큐레이터학과의 졸업생이 되었으며, 지금은 큐레이터가 되기 위해 여기저기 밟히며 꿈틀대고 있다. 나는 지금 예술기관 어디에도 속하고 있지 않다. 이 글을 쓰면서도 꽤 많은 곳에 인턴과 예비학예인력, 전시운영 스탭 지원서를 넣었지만 아직 합격 메시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어디에 놓아야 할 지 모르던 때에 ‘이곳이 네가 있을 곳’이라고 인사해준 ‘그 전시’를 만났기 때문에, 마침내 이곳에 정착하고자 한다. 예술계가 나를 외면하고 무시하더라도, 나는 그 이상을 바라보겠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1. 프로젝트 코드: 되기

프로젝트 코드: 되기 강리 붉은 글씨로 날짜를 새기어 넣는 구식 필름 카메라가 간신히 포착한 순간들이 있다. 가장 먼저 길가에 털썩 주저앉은 히스패닉 여성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굽은 등 뒤로 풍성한 컬을 자랑하는 가발이 흐른다. 네온 색상의 탑이 그을린 피부를 강조하고, 볼드한 귀걸이와 목걸이가 시선을 모아 독특한 화장법을 가리킨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런데 화려하게 꾸미고 여름볕을 활보하던 그가 짧은 머리에 투박한 안경을 하고서 파란 벨벳 소파에 누워있다, 여자를 안고. 나는 재빨리 다음 장으로 향했다. 바지를 끌어내리는 여자를 따라가던 노골적인 손이, 이번에는 폴을 잡고 있다. 그는 이제 클럽에서 레오파드 비키니를 입고 섹슈얼한 춤을 춘다.  우연한 순간을 낚아챈 듯한 이미지 속에서 그는  히스패닉 이 되었다가,  부치(Butch) 가 되었다가,  스트리퍼 가 되기도 한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이 되었고, 될 수 있다. 이처럼 니키 리(Nikki S. Lee)는  〈프로젝트(Project)〉(1997-2001) 연작 에서 스냅사진과 퍼포먼스를 이용하여 어떤 무리의 근방역으로 들어간다. 〈히스패닉 프로젝트〉에서 니키 리는 컬러 렌즈를 끼고 피부색을 그을리고 머리를 연장하고 스페니쉬 할렘에서 구입한 옷과 화장품을 사용하여 외양을 변형했을 뿐만 아니라, 뉴욕에서 열린 푸에르토리칸 데이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할렘의 사람들과 생활하며 그들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정황에 접근했다. 히스패닉 코드에 접속하는 니키 리의 이러한 태도는, 히스패닉 양식을 모방한다기보다, ‘히스패닉’이라고 명명된 리듬에 차이를 부여하며 반복하는 리토르넬로(ritornello)¹를 연주하는 일에 가깝다. 리토르넬로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는 ‘사이(entre)’를 생성하고, 여기에서 니키 리는 비로소 히스패닉-되기(devenir)²를 통과한다. 이때 히스패닉-되기가 벌어지는 공간은 니키 리의 ‘몸’이다. 〈프로젝트〉에서 니...

2. 우리는 화초이고 개구리이다

  우리는 화초이고 개구리이다 수연 2020년 여름, 엄마는 직장 동료한테 받았다며 ‘크루시아’라는 이름을 가진 열대 식물을 가져왔다. 엄마는 바쁜 직장 생활에도 크루시아에게 물 주기를 잊지 않았지만, 날씨가 추워지면서 크루시아는 모두가 집을 비웠을 때의 한기를 견디지 못했다. 여름 방학 때 크루시아를 처음 보고 겨울 방학을 맞이해 다시 얼마간 본가에 다녀온 나는 파릇하던 식물이 반년 만에 시들어가던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겼다. 좁은 화분에 겨우 뿌리를 내리고 힘겹게 자리 잡은 식물은 인간의 미적 관상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손수 길러진다. 식물은 스스로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하지만, 이는 화분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인간의 관리와 제약 아래 이루어진다. 화분 속 식물에서 현대 사회의 그늘 아래 발버둥 치는 우리의 모습이 보였다. 개인으로서 인간은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사회 체제의 존속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기도 하며, 사회나 특정 집단의 규범에 따라 규격화되기도 한다.  화분에 심겨 길러지는 식물과 사회의 흐름 속에 힘없이 내던져진 인간.  현대인과 식물의 닮은꼴을 인지한 계기는  장성은의  〈 flowerpot〉 연작 이었다. 연작은 2009년에 제작된 4장의 사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작품의 크기는 45X33.6cm로 동일하며, 모두 보존성을 높인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Archival Pigment Print)로 인쇄되었다. 동일한 크기와 인쇄 기법으로 제작된 4장의 사진에는 엇비슷한 광경이 포착되어 있다. 먼저 녹색 스타킹을 신은 사람이 다리를 꼬고 꽃문양과 꽈배기 패턴이 새겨진 흰 항아리 안에 서 있다. 전형적으로 관상용 식물의 화분으로 쓰이는 흰 항아리와 녹색의 다리는 은연중 ‘화분 속 식물’을 연상시킨다. 사진마다 다리를 꼰 자세나 스타킹의 색은 제각각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 사실을 알기 힘들다. 게다가 화분은 방향만 살짝 틀었을 뿐 그 성질이나 모습 자체에서 변화를 찾을 수 없다. 1) ...

2. 상실과 환대의 시나리오

상실과 환대의 시나리오 강리 사이프러스의 잎사귀를 스치는 밤공기는 잿빛이 감도는 코발트색이다. 짙은 파란색이 자아내는 스산함을 재빠르게 가로지르는 백색 구름이, 하얗게 빛나는 보름달을 감싸 안는다. 달빛은 어둠 속에서 형체를 길어올린다. 그러자 고대 로마의 벽돌 피라미드가 드러난다. 하늘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가는 피라미드의 날카로운 모서리는 명과 암을 분명히 구분한다. 피라미드의 밝은 면을 따라 시선을 낮추면, 나란히 서있는 세 개의 조형물이 보인다. 왼편에는 경사진 지붕을 이고 있는 함(函)이 있고, 오른편에는 좌대 위에 올라간 좁은 주둥이에 부푼 배를 가진 검은 트로피가 있다. 가운데에는 유려한 곡선으로 꾸며진 연분홍빛 공예품이 있는데, 피라미드 뒤편에 서있는 무뚝뚝한 도리아식 기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세 조형물 앞에는 두 개의 지석이 놓여있다. 달빛이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화면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시선은, 그 둘 중 리스(wreath)가 놓인 지석으로 향한다. 지석이 있는 풀밭 위로 달빛이 연극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쏟아진다. 달빛을 받아 마치 한낮처럼 빛을 발하는 대지는 불안하고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대기와 부딪히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처음 이 극적인 장면에 접했을 때,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단 둘이었다. 작가와 제목, 그러니까  표도르 브루니가 그린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총독, M. K. 드 머더의 무덤〉 이라는 사실이 전부였다. 이런저런 정보를 뒤적였지만, M. K. 드 머더에 관하여 알려진 바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아카돌리코 묘지¹에서 2016년에 열린 전시《피라미드의 발치에서: 로마 외국인 묘지의 300년》의 카탈로그에서 머더로 추정되는 인물에 관한 정보를 딱 한 문장 얻을 수 있었다. “1834년에 그의 시신은 모스코바로 송환되었다. (1834; his body was repatriated to Moscow.)”² 브루니가 작품을 완성한 시점은 1835년이다. 그러니까 브루니가 그림을 그렸을 무렵에는 이미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