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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실과 환대의 시나리오


상실과 환대의 시나리오

강리

사이프러스의 잎사귀를 스치는 밤공기는 잿빛이 감도는 코발트색이다. 짙은 파란색이 자아내는 스산함을 재빠르게 가로지르는 백색 구름이, 하얗게 빛나는 보름달을 감싸 안는다. 달빛은 어둠 속에서 형체를 길어올린다. 그러자 고대 로마의 벽돌 피라미드가 드러난다. 하늘을 향해 가파르게 올라가는 피라미드의 날카로운 모서리는 명과 암을 분명히 구분한다.

피라미드의 밝은 면을 따라 시선을 낮추면, 나란히 서있는 세 개의 조형물이 보인다. 왼편에는 경사진 지붕을 이고 있는 함(函)이 있고, 오른편에는 좌대 위에 올라간 좁은 주둥이에 부푼 배를 가진 검은 트로피가 있다. 가운데에는 유려한 곡선으로 꾸며진 연분홍빛 공예품이 있는데, 피라미드 뒤편에 서있는 무뚝뚝한 도리아식 기둥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세 조형물 앞에는 두 개의 지석이 놓여있다. 달빛이 지시하는 방향을 따라 화면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시선은, 그 둘 중 리스(wreath)가 놓인 지석으로 향한다. 지석이 있는 풀밭 위로 달빛이 연극 무대의 스포트라이트처럼 쏟아진다. 달빛을 받아 마치 한낮처럼 빛을 발하는 대지는 불안하고 으스스한 기운이 감도는 대기와 부딪히며 긴장감을 조성한다.

처음 이 극적인 장면에 접했을 때, 내가 알고 있는 정보는 단 둘이었다. 작가와 제목, 그러니까 표도르 브루니가 그린 〈차르 알렉산드르 2세의 총독, M. K. 드 머더의 무덤〉이라는 사실이 전부였다. 이런저런 정보를 뒤적였지만, M. K. 드 머더에 관하여 알려진 바는 거의 없었다. 그나마 아카돌리코 묘지¹에서 2016년에 열린 전시《피라미드의 발치에서: 로마 외국인 묘지의 300년》의 카탈로그에서 머더로 추정되는 인물에 관한 정보를 딱 한 문장 얻을 수 있었다. “1834년에 그의 시신은 모스코바로 송환되었다. (1834; his body was repatriated to Moscow.)”²

브루니가 작품을 완성한 시점은 1835년이다. 그러니까 브루니가 그림을 그렸을 무렵에는 이미 그의 무덤이 비어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주인이 없는, 혹은 없어질 밤의 무덤가를 서성이는 화가. 그리고 그 곁에 영원불멸할 것처럼 서있는 고대 로마의 피라미드. 세찬 바람에 을씨년스럽게 찢어진 구름 사이로 지석을 다정하게 비추는 보름달. 브루니는 사라져가는 것에 관하여 떠올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브루니는 상실에 대항하고자 그림을 그리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시나리오는 상상에서 끝난다. 이 작품을 그릴 무렵 브루니는 로마의 아카돌리코 묘지가 아닌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의 이젤 사이를 거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1830년대 초반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아카데미의 교수로 있었고, 1838년이 되어서야 로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이탈리아 유학시절에 머더의 무덤을 직접 보았을 수도 있지만, 이미 니엡스와 다게레가 최초로 사진을 인화한 지 10여년이 흐른 시점이니, 화폭의 선명함이 브루니의 감관에서 기인하였을 것이라는 추측 역시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이탈리아계 러시아 화가로서 로마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오가며 작업 활동을 이어갔던 브루니에게, 러시아 관료로서 이탈리아의 사설묘지에 묻혔던 머더의 송환 소식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그러니 다른 시나리오를 써보자.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러시아가 받아들인 브루니와 러시아의 관료로서 이탈리아 묘지에 묻힌 머더, 두 사람은 서로에게 거울과 같다. 그렇다면 브루니의 세밀한 기록은 받아들여진 자로서 환대의 경험이 공명하는 순간이다.

두 번째 시나리오를 다루기 위해서는 브루니와 머더가 각각 러시아와 이탈리아 사회의 이방인이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먼저 러시아 제국이 인종적으로 엄격했다는 역사적 사실과 더불어 20세기 중반까지 미국에서 남동부 유럽 출신 이민자가 백인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사회학적 연구(진구섭, 2020)를 참고할 때, 브루니는 이방인으로서 러시아 사회를 감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질적인 존재가 동질성의 사회에 주는 긴장과 자극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브루니는 이탈리아 묘지의 러시아 관료 머더를 드라마틱하게 연출할 수 있었다. 브루니는 들풀의 종류와 피라미드의 벽돌 개수까지 담아낸 세밀한 묘사, 그리고 정교한 빛의 사용으로 감상자의 시선을 화면에 효과적으로 집중시킨다. 집요한 묘사가 불러일으키는 몰입은 감상자를 자연스레 낯선 풍경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감상자는 화면 곳곳을 응시하면서 풍경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결국 공간의 주인으로 자리매김한다. 마치 브루니와 머더가 낯선 땅에 받아들여진 것처럼.

모든 사람은 먼저 받아들여진 자에 의해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간혹 이 사실을 잊기라도 하는지, 앞장 서서 난민 수용을 반대하고 노키즈존(No-Kids Zone)을 만든다. 그리고 세계에 늦게 도착했다는 사실이 차별과 배제의 당연한 근거라도 되는 듯 군다. 어처구니 없지만 그 누구도 이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모두가 주인이면서 이방인이고, 선택하는 자이면서 선택받은 자이기에. 오로지 환대의 순간을 기억하는 일만이 두 역할 사이의 낙차를 줄일 수 있으며, 공존을 상상하게 한다. 다시금 환대를 기억하자.

                      
각주
¹ 프로테스탄트 공동묘지. 바티칸에서 가톨릭 교도가 아닌 사람은 성 안에 묻힐 수 없었기 때문에, 1743년 비가톨릭 교도를 위한 사설 묘지로 조성되었다. 그러나 사설묘지는 가톨릭 교회와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해 연고자들이 사비를 들여 관리해야 했는데, 시간이 흐르자 무연고 무덤이 늘어나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2006년 세계유적기금이 아카돌리코 묘지를 ‘100대 요주의 유적’으로 지정하기도 하는 등, 보존을 위한 노력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시인 존 키츠와 퍼시 비시 셸리,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 등의 무덤이 있다.

² STANLEY-PRICE, NICHOLAS. “Artists’ Views of the Protestant Cemetery in Rome: Commissions, Souvenirs and the Visual Record.” in Nicholas Stanley-Price, Mary K. McGuigan and John F. McGuigan Jr. At the foot of the Pyramid: 300 years of the cemetery for foreigners in Rome (2016): n. pag. Pr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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