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코드: 되기
강리
붉은 글씨로 날짜를 새기어 넣는 구식 필름 카메라가 간신히 포착한 순간들이 있다. 가장 먼저 길가에 털썩 주저앉은 히스패닉 여성이 보인다. 자연스럽게 굽은 등 뒤로 풍성한 컬을 자랑하는 가발이 흐른다. 네온 색상의 탑이 그을린 피부를 강조하고, 볼드한 귀걸이와 목걸이가 시선을 모아 독특한 화장법을 가리킨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런데 화려하게 꾸미고 여름볕을 활보하던 그가 짧은 머리에 투박한 안경을 하고서 파란 벨벳 소파에 누워있다, 여자를 안고. 나는 재빨리 다음 장으로 향했다. 바지를 끌어내리는 여자를 따라가던 노골적인 손이, 이번에는 폴을 잡고 있다. 그는 이제 클럽에서 레오파드 비키니를 입고 섹슈얼한 춤을 춘다. 우연한 순간을 낚아챈 듯한 이미지 속에서 그는 히스패닉이 되었다가, 부치(Butch)가 되었다가, 스트리퍼가 되기도 한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이 되었고, 될 수 있다.
이처럼 니키 리(Nikki S. Lee)는 〈프로젝트(Project)〉(1997-2001) 연작에서 스냅사진과 퍼포먼스를 이용하여 어떤 무리의 근방역으로 들어간다. 〈히스패닉 프로젝트〉에서 니키 리는 컬러 렌즈를 끼고 피부색을 그을리고 머리를 연장하고 스페니쉬 할렘에서 구입한 옷과 화장품을 사용하여 외양을 변형했을 뿐만 아니라, 뉴욕에서 열린 푸에르토리칸 데이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할렘의 사람들과 생활하며 그들의 구체적이고 특수한 정황에 접근했다. 히스패닉 코드에 접속하는 니키 리의 이러한 태도는, 히스패닉 양식을 모방한다기보다, ‘히스패닉’이라고 명명된 리듬에 차이를 부여하며 반복하는 리토르넬로(ritornello)¹를 연주하는 일에 가깝다. 리토르넬로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공존할 수 있는 ‘사이(entre)’를 생성하고, 여기에서 니키 리는 비로소 히스패닉-되기(devenir)²를 통과한다.
이때 히스패닉-되기가 벌어지는 공간은 니키 리의 ‘몸’이다. 〈프로젝트〉에서 니키 리의 신체는 생물학적 실체라기보다, 사회적이고 상징적인 힘이 강렬하게 표현되는 실재이다. 체현된 실재(embodied entity)로서 〈프로젝트〉는, 다양한 차이와 결합하며 신체의 변용 능력을 향상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니키 리의 신체가 복수의 되기를 통해 변용을 거듭하며 맺은 연결망은 다양한 경험의 위치를 공유하며 하나의 세계를 형성한다. 차별과 억압의 원리 아래 구성된 현실들이 발현되는 이 세계는,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차이로 가득차있다.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이질적인 현실에서 상호 연결성을 목격하고 서로를 향한 책임감을 확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니키 리의 〈프로젝트〉는 환경과 관계 맺으며 변화하는 정체성의 비본질성만을 지시하지 않는다. 동일한 것으로 수렴하지 않고 차이 나는 것들을 횡단하는 이 작업은, 대문자 ‘인간’에 대한 저항은 물론 타자와 연결되는 관계적인 생성을 내포하며, 윤리적 공동체의 발명을 상상한다. 〈프로젝트〉는 더 이상 기록된 과거의 허구가 아니며, 현재의 체현된 실재이자 미래의 공동체를 앞당겨오는 일이다. 20여년이 지난 지금, 〈프로젝트〉의 임무는 완수되었는가?
각주
¹ ‘리토르넬로(ritornello)’는 본래 변화하며 되풀이되는 악곡의 형식을 가리키는 말로,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해 차이와 반복을 가로지르는 생성의 원리로서 제시되었다.
² ‘되기(devenir)’는 주어진 보편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입자를 생성하는 강렬한 흐름이다. 또한 다수성의 척도에 의해 규정된 정체성을 단순히 모방하는 행위가 아니라, 구체적이고 특수한 정황 속에서 동일성의 지배적인 원리를 뒤흔드는 사건이다. 그렇기에 되기는 또 다른 세계를 만드는 역량이며, 명확히 고정된 정체성을 향한 비판이다. 따라서 여성조차 여성-되기를 통과해야 하며, 이를 통해 다른 질서에 속한 것과 관계 맺고 지배 권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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