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에 드리운 마음의 그림자를 따라서
수연
요즘은 어딜 가든 미술관, 박물관이 생기고 있습니다. 도대체 누가 가길래 계속 만드는 걸까요? ‘우아하고 고상하다고’ 평가받는 예술은 팍팍한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집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기도 바쁜데 시간을 쪼개어가며 굳이 예술 작품을 감상해야 할까요?
적어도 저는 예술 감상이 지속되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작품 속에는 예술가들의 분투와 그 끝에 이루어 낸 융화의 조각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위대한 천재’라고 불리는 예술가들의 고뇌는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냐 묻는다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그저 삶이 녹록지 않은 한 인간이었습니다. 미술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고 해서 그들의 삶이 완전하지는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랫동안 성실하게 작업했으나 갖은 오해와 비난으로 힘겨워한 빈센트 반 고흐,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모두가 그러듯 죽을 만큼 괴로워한 잔 에뷔테른, 평생을 트라우마와 싸우느라 고군분투하기도 한 프리다 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위대한 천재’들 또한 세상을 살아가며 목격하는 수많은 장면 속에서 끊임없이 좌절하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들의 작품과 제 삶이 겹쳐 보일 때, 세상에 느꼈던 불화의 감정은 어느 순간 해소되었습니다. 거창한 응원이나 조언보다, 작품을 감상하며 저와 비슷한 개인으로부터 받는 위로가 더 컸습니다. 루이즈 부르주아의 설치 작품에서 어머니에게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하고, 에드워드 호퍼의 생애와 작품을 대조하며 관계에서의 거리감과 자유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이해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예술은 때로 말로도, 글로도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우리로 하여금 이해하게 합니다.
독일 출신의 예술 및 영화 이론가 루돌프 아른하임(Rudolf Arnheim)은 저서 『미술과 시지각(Art and Visual Perception)』에서 “미술 작품을 이해하는 것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일이고 한 작품에서 모두가 똑같은 것을 볼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림이나 조각이 단지 ‘옮겨놓은 스크린’에 불과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모든 관람자는 그 스크린에 자기 마음의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유년 시절 미술 학원에서 생긴 집착으로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알록달록’이라는 형식적 요소가 무척 중요했습니다. 아무도 시킨 적 없음에도 모든 칸에 서로 다른 색을 칠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것이 사람이어도 선으로 나뉜 각 면은 모두 다른 색으로 칠해야 했습니다. 이렇게까지 ‘알록달록’¹에 집착한 이유는 그 시절, 제가 바라본 세상은 흑과 백에 들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게 알록달록한 그림은 다양한 색채의 사람이 모두 인정받고 어우러지는 세상이 왔으면 하는 소망이자 잠시나마 위안을 주는 도피처였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나 제 삶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에 마음의 그림자를 드리우게 됩니다. 예술 작품을 바라보며 오해나 미숙한 해석을 반복할지라도,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오롯이 자기 자신과 관계 맺기에 의미 있습니다. 어쩌면 다른 어떤 여가와 인간관계에서도 해결할 수 없는 찌뿌둥함은 예술만이 해소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지금 당신의 삶에는 어떤 갈증이 있나요? 당신은 어떤 싸움을 하고, 또 어떤 화해를 하며 살아가고 있나요? 작품에 드리운 마음의 그림자를 따라, 마음에 응어리진 이전의 관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경험합시다.
¹ ‘알로록달로록’의 준말. 여러 가지 밝은 빛깔의 점이나 줄 따위가 조금 성기고 고르지 아니하게 무늬를 이룬 모양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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